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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콘텐츠 상자/1인 출판사

1인 출판사를 그만 두는 이유 part.1

by 딥박스 2020. 9. 23.

1인 출판사를 운영한 지 어느 덧 10개월이 되었다.

운영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으로 연명을 했다.

 

나름 갖추어야할 건 다 갖췄던 사업이다.

비상주 오피스 계약을 통해서 자택 근무지만 사업장 주소가 있었고

사업자 등록을 통해 여러 독립서점들에 계산서 발행까지 했다.

 

다만 지난 4월 기성 출판사와 '글쎄 (Strong Words)' 정식출간 계약을 하게 되면서

더 이상 딥박스가 할 일은 없어졌고, 이제 전국에 깔린 유령 출판사의 길을 걷고 있다.

 

절필할 생각은 없기에 언젠가 딥박스라는 이름을 또 활용하여 책을 출판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올해 1주년을 맞아 잠정 폐업 처리를 할 것 같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비상주 오피스 1년치 임대료 60만원을 절약하기 위해서다. 

집이 자가였다면 유지가 가능했을 텐데, 이것도 현실의 벽이라면 벽이겠다.

 

이 외에는 모두 감정적인 이유들이다.

순서대로 정리해 보아야겠다.

 

 

 

 

1. 딥박스는 오직 내 책을 위한 순수한 의미의 1인 출판사였다.

 

남의 원고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정말 단 1도 없었다.

편집을 하고 디자인을 하고, 원고를 퇴고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무척이나 재밌지만, 어디까지나 내 글에 한해서다.

다른 사람의 글이라면 그 지겨운 인고의 세월을 감당할 엄두가 안 나고

무엇보다 잘 팔 자신이 없다.

 

내 책을 내가 못 팔면, 세상 탓, 독자 탓, 시스템 탓으로 돌려막기 하면서

적당히 만족하며 살 수 있는데,

남의 원고를 가지고 출판을 한다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소심한 나로서는 그럴 용기가 나질 않는다.

 

'책을 만드는 행위보다 내 책을 만든다는 성취감이 좋은 사람이다.'

나는 나를 상당히 잘 아는 편이라, 책을 처음 쓰는 순간부터

첵 읽는 것보다 글 쓰는 걸 더 좋아하고,

책을 읽고 감상평을 쓰는 것보다, 내 책의 리뷰를 읽을 때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딥박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본래의 숙명을 다하고 떠나는 셈이다.

 

 

 

2. 정식출간의 맛.

 

정식 출간하면서, 난 달콤함을 알아버렸다.

인쇄, 유통, 마케팅, 내가 가만 있어도 모든 게 이루어진다.

 

퇴고의 퇴고, 디자인 아이데이션,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면

책이 알아서 뚝딱 나온다. 심지어 퇴고도 에디터님이 다 봐주신다.

 

더 좋은 문장을 빨간펜으로 적어서 추천까지 해주는데

신선 노름이 따로없다.

 

대필 받는 연예인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상상해봤다.

대필받는 사람들 진짜 양심 없다 싶었다.

 

출판사에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느낌은 뭐랄까.

 

'이 많은 사람들이 책 하나에 투입되는데, 나 혼자서 이들과 겨룰셈이었는가?'

 

 

내 마음대로 책을 만들고 싶어서 1인 출판사를 만들긴 했지만

이왕 시작하는 거 좋은 책 만들어서 '자존감 수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같은

1인 출판사의 기적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도 흐릿해지더라.

승부욕이 발동했던 세계에서 목숨을 깎으며 (실제로 건강을 잃으며) 도전했는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을 때의 그 좌절감은 차마 말로 다 전할 수 없다.

 

그때 구층책방에서 손을 내밀어 주고, 물심양면으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

같이 일하고, 정식 출간하던 날, 손편지를 받고 입술이 살짝 떨릴 정도로 감동 받았다.

 

 

'글쎄' 만들었던 2년 간의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너무 외로웠다는 걸. 그 이유가 가장 힘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좋은 사람들과 같이 한 권의 책을 새롭게 완성하면서 얻은 경험,

그 만족감이 너무 커서 에디터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다.

 

'군생활 683일보다 더 긴 시간을 책 한 권에 쏟아 부었는데

이제는 진짜 '글쎄'에서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출판사를 접기로 다짐했다.

꽤 오랜 시간 다음 책도 내지 말자는 생각도 했다.

 

내 인생 최고의 퍼포먼스를 담아냈고

미련, 후회가 남지 않는 첫 결과물이었다.

지금보다 더 좋은 책을 써낼 자신이 없다는 생각과

만족감 그 사이에서,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할 타이밍이다.'

조용히 다짐했다.

 

더 좋은 책 말고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을 때만 등장하는 그런 작가.

전업 작가가 아니라서 억지스럽지 않고

정말 할 얘기가 있을 때만 나타나 던지고 가는 자연스러운 사람.

 

그리고 독자와 가장 가까운, 아주 똑같은 삶을 사는 작가로

살기로 했다.

 

책으로 부자가 될 생각이 없으면,

돈을 벌 생각이 없으면

정말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

 

책 말고 다른 일로 돈을 버는 게

내겐 너무 쉬운 일 같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계속...

 

(기획도 없고, 초고도 없고, 퇴고도 없는 글,

정말 오랜만에 써본다. 너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