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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콘텐츠 상자/1인 출판사

카피라이터에서 작가가 된 과정, 필명짓기

by 딥박스 2020. 2. 19.

2018년 1월에 독립출판으로 에세이 한 권을 출간했다.

당시 디자이너들과 함께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회사의 주업이 디자인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았던 카피라이터와 기획 업무를 담당하던

내 포지션에 대한 고민과 회사의 수익 채널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맞물리면서

내린 결론이 책을 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광고 AE 1년, 약사 시험준비 하루, 카피라이터 경력 2년, 마케팅 컨설팅 경력 1년을

겪어오면서 저 위의 하루를 빼고는 글을 쓰고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직업을 해왔으니

글쓰는 작업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책이란 전문직과 유명 인사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만한 훌륭한 사람들, 필력과 내공이 상당한 사람들만이 낼 수 있는 전유물로 생각했던 터라

두려움이 있었다. 바로 대형 서점에 달려가 베스트셀러와 신간 코너에서 시장조사를 했다.

한 시간에 30여 권의 책을 살펴보니, '이 정도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음 날부터 바로 책 구상에 들어갔다. 이 기분은 서점 에세이 코너 가보신 분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상식선의 자만심이라 생각한다. 

 

우선 본명이 매우 흔했기 때문에 출판시장에서 내 정체성을 쉽게 알릴 만한 필명이 필요했다.

서점을 비롯한 출판시장에서 작가는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자신만의 경쟁력이 된다. 물론 이미 본명 인지도가 높거나, SNS를 통해서 글로 대중에게

충분히 어필된 사람이라면 중요치 않을 수도 있으나, 나처럼 인스타그램도 안 하던 사람이나

이제 막 출발선상에 선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더 속도를 낼 수 있는 아이템이 될 수 있다.

 

필명은 독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한 번에 각인될 이름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의 첫인상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작가로 역할을 다 할 것이며, 어떤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내려갈지에 대한

초심을 닦는 과정이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필명 선정 기준을 선별해보았다.

 

0. 기존에 없던 이름이다.

1. 발음하기 쉽고 기억에 남는 독창적인 이름이다.

2. 어떤 스타일의 문체를 가진 작가인지 유추할 수 있다.

3. 실제 본인의 성격과 매칭이 잘 되는 이름이다.

4. 주변 사람들을 물론 내 마음에 든다.

5. 가볍고 의미 없는 유행어 등의 오래 사용할 수 없는 이름은 지양한다.

 

위의 기준 또한 각자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0, 1, 3, 4 항목은 브랜드 네이밍 작업 과정과 동일하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해볼만 하다.

 

 

다음은 필명의 아이데이션 과정이다.

하나의 브랜드, 캐릭터로서의 본인의 특징, 장점, 단점, 성향을 적고

그에 따르는 필명들을 마인드 맵에 가까운 셀프 브레인 스토밍한다. 

학창시절의 자신만의 별명 등 다양한 요소들이 있겠지만 객관화 과정을 통해 충분히 재미가 있는지, 나

만의 것인지 자체 필터링을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이름의 성씨와 두번 째 글자만 따와서 부르는 (ex. 박명근 -> 박맹, 안창민 -> 안창) 등의

필명은 개인적인 비중이 높은데다 독자로 하여금 호기심을 유발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는 이름 자체가 독특해서 본명 그대로 쓰는 사람들이 부럽다. ex. 추사랑, 필선, 동금

 심지어 그 흔한 이름 지은이들은 이름 자체로 작가가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대략 4가지 정도의 이름을 1차 선별했다.

  • 공감할 만한 이야기, 다른 사람에 딱 맞는 글을 써주겠다는 의미의 36.5
  • 본래의 나라면(민호)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꺼낼 수 있는 작가, Me No
  •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글을 쓴다. 도미노
  • 시를 공유하고 사랑하는 사람. 시공사

본명보다 못한 필명이었다. 내 이름이 담기면 객관화된 의미가 줄어들고

객관화된 의미와 재미를 추구하다 보면 나의 characteristic을 담기 어려웠다.

약 이틀 동안 이름만 고민하다가 답답한 마음에 책상을 치며 "아 딥빡!"이라고

외쳤는데,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침 내 성씨가 박씨인 것과 본의 아니게 세상 모든 불평불만을 다 가진 성격이라는 점,

모든 게 나에게 철썩 맞는 필명이었다. 게다가 '깊은 글을 쓰는 박민호'라는 초심을

견고히 할 수 있었고, 재미까지 있었다. 그 길로 바로 필명을 딥박으로 결정했다.

 

그런 딥박에게 첫 책은 고민할 필요없이

화가 나는 모든 순간들을 담은 앵그리 에세이 '시발점 (Angry Point)'이 되었다.

 

 

필명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가이드 기준을 만들 때 이미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성향과 취향이 담기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재미, 직관적인, 동일감 등이 주요 포인트였기 때문에 본래의 문체와 성격 등이

잘 담긴 필명을 지을 수 있었다. 이후 독립출판계에서 본인의 필명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보고도 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봉준호 감독에게 영감을 준 마틴 스콜세지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처럼

가장 당신스러운 필명으로 당신을 꼭 닮은 글로 자기만의 책을 내주시면 좋겠다.